가즈오 이시구로가 기억에 접근하는 방식.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은 과거에 남겨놓은 무언가, 케케묵어 고착화된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하지 않았더라면 가장 후회할만한 일을 택하라는 것이다. 앞을 내다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서 실패한 경험보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일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쯤, 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계를 유지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 시작의 과정을 제대로 겪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어중간한 선택을 했다. 일을 하면서 글을 써보지 뭐, 하는 식으로.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글만 쓰기를 고집했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후회의 감정은 잘못된 원인을 탓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나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감정일 따름이다. 그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나의 어떤 감각이 작동한 까닭일 텐데, 그 감각은 상처를 피해서 작동하려고 한다. 그리고 죄 없는 과거를 불러낸다. 과거를 불러내면서 불편한 감정들도 따라오고, 그것은 상처를 자꾸만 건드린다. 그런 탓에 나를 되돌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꼭 봐야 하는 어떤 지점을 벗어나게 된다. 그 지점에서 나는 어김없이 장님이 돼버린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런 탓에 과거는 늘 혼탁하고, 그것은 창백한 언덕 풍경과도 같다. 뒤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곳이 아파서이다. 아프니까 자꾸 그 아픈 곳 주변을 맴돈다. 아픈 곳, 상처가 난 곳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지점을 봐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내 생각에는 그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놓는 것이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아물 테니까. 그래야 그 아픔을 품고 나아갈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독백, 그리고 자기고백적 어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소설에서 서술자인 에츠코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려는 듯한 시도와 동시에 그것을 지우려는 서술자의 내면이 작동하는 모습을 투명하게 그려낸다. 에츠코는 그녀의 둘째 딸인 니키가 집에 오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과거를 떠올린다. 그녀의 둘째 딸은 첫째 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아픔이고 상처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오른다. 불편한 감정도 함께 찾아온다. 에츠코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 게이코에 대해 자세하게 떠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일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여기서 게이코를 언급한 것은 올해 4월 니키의 방문 때 그런 일이 있었고, 그 애가 와 있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사치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른다.
에츠코를 통해 기억을 풀어내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술에는 어쩐지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스스로 편집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이다. 에츠코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그녀 자신의 기억은 진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보인다. 그녀 자신이 긍정하는 듯한 자신의 과거. 자신의 첫 남편과의 순종적인 결혼생활과 그와 대조되는 사치코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그녀가 자신의 순종적인 태도를 긍정 혹은 방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이야기 곳곳에 그에 대한 불편한 감정 혹은 탈출구를 찾는듯해 보인다. 때때로는 사치코의 이야기가 마치 어떤 시기의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 안에서 평행적인 구조를 이루는 것은 게이코의 죽음과 마리코의 죽음이다. 두 딸의 죽음은 데칼코마니와도 같다. 따라서 자신의 딸인 게이코의 이야기를 사치코와 마리코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사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녀가 왜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는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도 어떤 정보도 없다. 영국인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의 장소로부터 물리적으로 아주 멀리 와있다, 그리고 이민한 일본인인 그녀의 딸 게이코가 목 메달아 자살했다. 이 두 사실관계는 긴장감을 만들고 있고, 그 사이 어딘가에 그녀의 상처가 있다. 시대가 그녀에게 남긴 아픔과 답답함 그리고 자책감과 같은 것일까?
에츠코는 계속해서 그 상처를 들춰보려고 한다.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소설을 통해 상처가 깊은 기억을 위로하고 품어가는 시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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