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새 70대 할아버지가 되어있지만, 최근에 나오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30-40대에 속한다. 제일 최근에 나왔던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인 아마다 도모히코도 40세 정도이다. 가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사진이 나오는 뉴스를 보면, '이렇게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즐겨 쓰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소설 속 이야기가 곧 작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착각에 빠져버리게 된다. 더군다나 그의 글은 유독 서술자의 삶과 하루키의 삶이 다른 작가들보다 더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하루키의 나이가 서른이 되었을 즈음 출간되었던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소개해볼까 한다.
하루키도 한 때 포기하려 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내용이 시작되기 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시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어느 날 갑자기 분출된 하루키의 창작욕이 이 작품을 만들어냈고, 이것으로 우리가 아는 하루키 월드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난관이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갑자기 뭔가 쓰고 싶어 졌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종이에 적어냈더니 이렇게 작품이 되었더라 하는 식으로 작가가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는 그가 이 첫 소설에 남겨놓은 작가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옛날부터 작가는 아니더라도,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시도했다가(대학을 연극영화과에 다녔으므로), 결국은 제대로 쓰지 못하여,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나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붓을 꺾었다고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하고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내 나름으로 무리 없이 인생을 살았다. 일도 순조로웠고, 나 자신도 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자신이 만년필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내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스물아홉 살의 어느 봄날, 진구 구장의 맨흙더미 외야석에 누워있다가' 문득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게 뭐든 간에 써보자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싸구려 만년필을 사서 매일 장사를 끝마치고(하루키가 20대 후반에 재즈바를 열어 운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밤중에 부엌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원고지에 글을 써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정리해보자면, 하루키는 늘 글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그 자신이 쓴 결과물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갑자기'와 '정말 불현듯'이라는 말은 어떤 응축된 욕망의 분출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을 여의치 않은 환경 때문에 그만둔 뒤, 모포로 덮어놓고 삶을 살아가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되어 돌아와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그런 것과도 같은 것 아닐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나는 그의 첫 소설에서 그가 써낸 문장들 중에서도 제목이 그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다. 물론 제목은 편집자가 결정한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튼 이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인 2015년인데, 그 후로 이따금씩 이 책이 문득 그리워진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나에게 어디선가 바람이 속삭이는 것 같이. 그 바람의 냄새는 젖은 아스팔트의 냄새이고, 거기에서는 묘한 상실감이 느껴진다. 가슴 깊은 곳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상실감. 그것이 내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마다, 이 책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이 소설 속 '나'의 이야기는 마치 하루키의 이야기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이 대부분 어느 정도 자전적인 서술 방식과 그러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첫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들보다 더 진하게 그 자신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 하루키는 이러한 선언적인 문장을 남겨둔다.
이제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며, 얘기를 끝난 시점에서도 어쩌면 사태는 똑같을지도 모른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월드의 할 수 있는 제이스 바, 맥주, 담배, 쥐, 데이비드 하트필드과 같은 그의 공상 속 인물과 장소들이 나오고 그것들은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인 공허함과 상실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개념들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90년대생인 나에게도 유효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이미 나 이전의 세대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지금 30대인 나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작가이며, 그의 감성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 공감을 얻고 있다. 공허함과 상실감을 언제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그의 방식과 그가 지어내는 신선한 단어의 결합들은 독자의 상실과 공허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이 어느 때보다도 짙어져 가는 요즘, 그의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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