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의 시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노래하듯 영국식 발음으로 읊어주던 교수님이 생각난다. 19세기 영미문학 수업에서 처음으로 배웠던 시인이었다. 블레이크는 프랑스 대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낭만주의의 흐름을 따랐다. 그리고 예언자적 시인을 자처했다. 또, 산업혁명의 최대의 피해자를 어린이로 보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노래한 시를 많이 썼다.
소설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에서 '지옥의 격언'(1793)의 한 구절이다. 지옥의 격언은 구약의 잠언과는 반대로 악마적 격언들의 계시록이다. 이 시 자체가 세상의 악과 부도덕함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구절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죽은 이들을 위한 복수를 실천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시구는 동물을 위한 복수극을 전개하는 두셰이코의 이야기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모럴 스릴러 & 생태주의 스릴러
올가 토카르추크가 이전에 써오던 짧은 에피소드 형식의 서사 방식과는 다르게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올가 토카르추크가 새롭게 시도한 장르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스릴러물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결과물을 냈다. 스릴러/범죄/추리물이 범인을 밝혀내고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을 플롯의 구조로 삼고 있다면,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그와 같은 플롯을 따르면서도, 몇몇의 레이어를 겹쳐놓는 데 성공한다. 하나는 범인이 곧 서술자인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이런 장치는 기득권자의 삶과는 거리가 먼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두셰이코의 시점에서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동기에 감정이입이 되도록 돕는다. 두 번째로 주인공인 두셰이코가 동물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사업가, 그리고 신부 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저지르는 동물에 대한 폭력을 폭력으로 저항하고 있는 두셰이코의 행동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독자에게 도덕적 물음을 가지게 한다. '동물의 죽음을 위한 복수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하는 물음말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답을 찾기보다는 떠오르는 물음들을 좀 더 가지런히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읽고서, 위와 같은 물음을 두고 찬성과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음 그 자체이다. '동물의 죽음을 앙갚음하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앞서 '동물을 무분별하게 죽이는 일은 정당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해볼 필요가 있다. 동물을 죽이는 일과 사람이 죽이는 일은 무엇이 다른가? 동물과 사람의 존재의 무게는 다른 것인가? 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용인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가? 그 저변에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보아야 한다. 그런 질문에 대한 고민에서 생태주의/생태철학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생태주의라는 생각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독자들을 데려다 놓는 것 같다. 이 지점은 상당히 정치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 독자를 어떤 지점으로 설득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장 곱씹어보기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행성의 배열, 나아가 우주 전체가 깃들어 있다." (p. 208)
점성학의 세계관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두셰이코에게 하나의 완벽한 우주와도 같다. 그녀는 밤하늘을 보며 완벽한 질서를 가진 우주를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계시를 얻는다. 동물을 위한 복수극도 점성학이 제안한 일을 그녀가 행한 것일 뿐이다. 자연이 그를 점지하고, 그녀에게 계시한 것뿐이다. 세상은 늘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타자로부터 배제당하며, 집단으로 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반대라면, 타자로부터 배제당하거나 거절당하지 않도록 혹은 집단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도록 가면을 수십 개 바꿔가며 쓰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두셰이코가 처한 현실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외면이며 소외였다. 경찰서를 찾아가, 학교 당국을 찾아가 항의해도 별 소용이 없다.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고 외면이고 무시였다. 그런 점에서 점성학은 두셰이코에게 하나의 완벽한 대안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점성학, 토정비결, 사주와 같은 것들은 꽤나 그럴듯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이유는 그 완성된 지도가 내가 타자와 집단이 아닌 나 자신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길 혹은 대안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곧바로 이 문장을 포스트잇에 옮겨놓았다.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나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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