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토카르추크에 대해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그녀가 써온 작품들 중에서도 초반에 쓰인 소설에 속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과 칼 융의 사상과 불교철학에 조예가 깊다. 그녀는 198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약 10년 동안 심리 치료사와 선생들의 심리 상담 트레이너로 일했는데, 그동안 1989년에 첫 시집 「거울 속의 도시들」과 1993년에 첫 소설 「책의 인물들의 여정」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초석을 다졌다. 첫 시집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에 반해, 첫 소설은 성공적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자신이 하는 심리 상담일에 대해서 자신의 환자들보다 그녀 자신이 더 신경증적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일을 병행해가면서 시집과 소설을 냈고, 대중의 좋은 평가를 받은 첫 소설 이후에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베를린을 돌아다니면서 전업작가로 전향했다.
신화적 공간과 현실적 사건의 중첩
이 소설은 '태고의 시간'이라는 부제의 글로 시작되는데, '태고'는 원시적인 시간, 아주 오래된 옛날을 뜻한다. 이 시작에서 태고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동서남북에 무엇이 있는지, 강이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지 공간을 원형적으로 설명한다. «태고의 시간들»이 유독 신화적이게 느껴지는 건 이러한 공간적 배경이 때문인 것 같다. 아주 오랜 옛 장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은 신화적이고 먼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20세기 폴란드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그 장소에서 일어난다. 현실이면서도 허구적인 시간은 마을 주민과 마을, 그리고 사물들, 자연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태고의 시간들»은 그 시간들을 쌓아올려나가는 것처럼 이야기해나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안단테 빠르기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리게 전개된다.
하나의 세대 다른 한 세대로. 그렇게 거듭 이어져가는 3대에 걸친 가족(미하우와 게노베파, 미시아와 이지도르, 아델카)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면서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점령당했던 삼국 분할기(1795~1918)의 막바지인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2차 세계대전(1939~1945),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동,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1949~1989), 그리고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과 체제 전환(1989)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폴란드 영토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태고의 시간들»의 배경(p372, 옮긴이의 말)'이 된다.
역사 바깥의 이야기
#1. "1914년 여름, 밝은색 군복을 입은 러시아 군인 둘이 말을 타고 미하우를 찾아왔다. ...... 감자꽃이 떨어지고, 작고 푸른 열매가 영글 무렵, 게노베파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니, 5월 말 건초를 처음 베어낼 무렵이 틀림없었다." (p.8-9, 게노베파의 시간 중에서)
#2. "멀리서 울리는 단조로운 총성이 숲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긴 악몽을 꾸는 중이었다. ...... 미시아는 지금 너덧 살이다. 아이인 그녀가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과 전쟁에 관한 꿈을 꾸는 중이다. "그만 깨어나고 싶어."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 하늘이 마치 통조림통의 뚜껑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신이 사람들을 가두어놓은 것만 같았다." (p.194-195, 미시아의 시간 중에서)
#3. "하지만 양로원의 시간은 다른 곳에서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갔다. 시간의 물줄기가 훨씬 가늘고 비좁았다. 한 달, 두달이 지나면서 이지도르는 기력을 잃었고, 결국 묘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p.351, 이지도르의 시간 중에서)
#4. "아델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핸드백을 고쳐 멨다. 그리고 이탈리아제 구두와 낙타털로 짠 값비싼 모직 코트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패션 잡지의 모델이나 대도시에서 온 여자들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 아델카는 고시치니에츠의 오르막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리수는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가벼운 돌풍이 불어와서 가지를 흔들어대자, 보리수 잎사귀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언젠가 파푸가의 텃밭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지금은 풀숲만 무성했다. (p.358-364, 아델카의 시간 중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이야기가 위와 같이 표현들로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연대기가 된다. «태고의 시간들»의 결말부에 해당하는 네 번째 인용인 아델카의 시간에서 보리수가 등장한다. 보리수는 이야기 곳곳에서 종종 등장했는데, 이 나무를 지표로 공간과 시간의 중첩 효과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연대기적으로 쌓아 올려나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장소와 그 장소에 오랜 세월을 서있던 나무는 그대로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오히려 '작아 보였다'라고 묘사한다. 이런 작은 표현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한 장소에서 시간이 흘러서 지금이 된 게 맞는 걸까? 단순하게 태고라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고, 아주 거대한 시간 안에서 보자면 작은 시간들은 한 장소에 동시다발적으로 있는 무언가 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시간과 인간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 전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작게는 하나의 장소로 국한시켜서 그 장소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만큼 인위적인 것도 없고, 시간과 연계된 사건은 공간에 쌓인 먼지 같은 것 아닐까?
이 대목에서 "더 이상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좀 더 높은 구적법에 따라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공간들만 존재하며, 그 공간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되고, "라고 아우스터리츠했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