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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위안을 주는 문장들로 가득한 소설

by 한낮의꿈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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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 올가 토카르추크 / 민음사 (2007;원문기준)

밤하늘의 별자리 같은 소설

100여 편의 짧은 글들이 하나의 소설이 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별자리에 비유했다. 밤하늘 이곳저곳의 별들이 별자리를 이루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듯, 자신의 짧은 글들이 모아 별자리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짧은 글을 그러모아 하나의 글로 묶는 방식은 다른 작품에도 적용된다. «태고의 시간»도 그렇고, «낮의 집, 밤의 집»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작가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꼈다. 한편으로는 산문 시를 여러 편 읽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서사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별자리 같은 이 소설은 서사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마음 깊숙히 자리한 고독한 감정을 다독여 주는 편지

이 소설의 꽤 많은 부분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짐을 싸고, 공항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가서, 항공보안검색대를 지나, 면세의 공간을 지나, 비행기에 탑승한다. 비행기에 탑승하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나와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장시간 비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옆 자리 사람에게 말을 걸어 그 시간의 지루함을 떨쳐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동의 시간. 그 시간이 정말 여행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시간 말이다. 그때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잠시 그 여행의 목적 그 자체도 잊어버리고, 그 불안정한 상태를 보게 된다. 그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한 문장 한 문장이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나 홀로 된 외로운 상태의 고독과 불안함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나한테 보낸 여러 편의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장애인 아들을 간호하며 살아가는 여인, 지하철역 앞에서 춤을 추는 노파, 휴가를 떠나 부인과 아이를 잃어버린 남자, 첫사랑을 찾아 모국으로 돌아온 연구원, 쇼팽의 누이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여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짧은 여정들을 눈으로 뒤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상처가 나의 상처 또한 위로해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목과 정착의 테마, 그리고 영화 노마드랜드

내면의 상처는 방황과 방랑의 동력이다. 우리는 그것을 어쩌지 못한다.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때도 있고, 상처인줄 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단지 부단히 움직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디로든 움직여서 그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영역 바깥으로 한 스텝만 걸어 나가도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정착한다. 하지만 정착하는 순간 무언가가 나를 짓누른다. 그건 아마 나 자신, 나 자신의 상처일 것이다.

클로이 자오의 영화 노마드랜드를 보다보면 이 소설의 한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펀의 노마드 생활을 영상으로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펀은 그녀의 낡은 벤을 개조해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벤으로 이동하며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돈다. 그녀에게 일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화상에서는 여러 사회구조적인 문제들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그녀의 유목생활의 근원은 그녀 내면의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상처를 품고 삶을 이어나가려고 그런 삶을 택한 것이다.

어디선가 유목 생활을 하던 고대의 원주민들의 자생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수십여 가지의 동식물의 정보를 알고 있었고, 꽤 넓은 영역의 지리적 정보를 꽤 차고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택시기사들도 휴대폰 속 내비게이션만 따라다닌다. 그리고 우리는 늘 먹는 것만 먹고 산다. 정착이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답답함, 아니 어쩌면 꽤 높은 강도의 답답함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스텝 바깥으로 나서 보아 야한다. 발걸음을 내디뎌보면, 그것이 한동안의 방랑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짓누르는 어떤 감정들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 움직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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