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황제 존스』(The Emperor Jones)
이 희곡은 1920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극의 주인공으로 삼고 무대 위로 등장시킨 작품으로써 의미가 깊지만, 그 의미의 중심에 서있는 흑인이라는 인종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기보다는 그 문제를 보편화하고 추상화시킨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한 평가에는 이견도 많다. 그럼에도 오닐이 이 작품 안에서 흑인을 그리고 있는 방식이 흑인이라는 인종이 가지는 백인에 대한 동일시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해볼 만하다.
존스가 아직 궁을 탈출하기 전인, 그러니까 그가 그의 내면의 무의식 상태에 가까워지기 이전인 제1장에서 주인공인 존스의 언행들을 살펴보면, 만약 존스를 흑인이라고 따로 언급하지 않고, 대화에서 흑인의 언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흑인인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존스의 언행은 곧 백인이 하는 언행으로 보인다. 존스는 자신이 마치 백인이라도 된 것인 양 백 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며 말한다. 그는 섬의 원주민들을 깜둥이 놈들(niggers)라고(niggers) 부르고, 백인들의 경제논리를 따르며, 백인들의 제국주의적인 면모까지 보인다.
존스 : ...... 자네 설마 내가 황제의 지위와 명예 때문에 이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권력과 명예는 일부일 뿐이야! 그건 덜떨어진 깜둥이 놈들의 대가리를 돌리기 위해서야.... 놈들은 대 서커스를 원하는 거야. 난 그걸 주고 돈을 받은 거야.... 저 긴 들판은 언제든 내 거야!
JONES : ...... You didn't s'pose I was holdin' down dis Emperor job for de glory in it, did you? Sho'! De fuss and glory part of it, dat's only to turn de heads o’ de low−flung, bush niggers dat's here. Dey wants de big circus show for deir money. I gives it to 'em an' I gits de money. [With a grin.] De long green, dat's me every time!
백인이 흑인을 얼마나 백인화 시켰는가
더불어 그는 그 자신의 인종이 백인들에게 당했을 법한 행동들을 그대로 섬의 원주민을 상대로 자행하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가 백인에게서 배운 백인들의 지능과 수법이다. 그리고 그는 흑인의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성경이나 기적, 오 주여와 같은 백인의 언어적 습관을 따라 그것을 구사하기도 한다.
존스 : ...... 그 렘이라는 깜둥이 놈이 사람을 사서 날 죽이려고 했었지. 10피트 거리에서 나한테 겨냥을 했지만 그 녀석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내가 먼저 쏴 죽였지!
내 말 알겠나?
JONES : ...... When dat murderin' nigger ole Lem hired to kill me takes aim ten feet away and his gun misses fire and I shoots him dead, what you heah me say?
......
존스 : (웃으면서) 그랬더니 그 깜둥이 바보들이 내가 뭐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대가리를 조아리는 거야. 오 주여. 그때부터 난 그 사람들을 내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한 거지. 내가 채찍을 휘두르면, 그놈들은 놀라서 펄쩍 뛰어대는 거지.
JONES : [Laughing] And dere all dem fool, bush niggers was kneelin' down and bumpin' deir heads on de ground like I was a miracle out o’ de Bible. Oh Lawd, from dat time on
I has dem all eatin' out of my hand. I cracks de whip and dey jumps through.
그러니까 이 극의 도입부인 1장에서 존스는 흑인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백인으로써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존스의 언행은 ‘백인이 흑인을 얼마나 백인화 시켰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존스는 흑인이지만 완전하게 백인을 재현하고자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 에게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스의 백인에 대한 동일시는 그의 언행뿐만 아니라 존스를 둘러싼 배경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머무는 곳인 그의 궁전은 ‘넓고 천정이 높은 벽이 흰 방, 바닥은 흰 타일(a spacious, high−ceilinged room with bare, white−washed walls. The floor is of white tiles)’이며 그를 황제로 만드는데 미신을 만들어내는 도구인 ‘은총알(silver bullet)’’ 그리고 (2장에서) 그가 묻어둔 식량의 위치의 표식이고 따라서 찾아 헤매게 되는 ‘흰 돌(White stone, white stone, where is you?)’과 그의 화려한 복장(He wears a light blue uniform coal, sprayed with brass buttons, heavy goldchevrons on his shoulders, gold braid on the collar, cuffs, etc. His pants are bright red with a light blue stripe down the side. )에서도 백인의 것에서 느끼는 우월성에 대한 갈증과 그에 대한 동일시의 욕구를 보여준다.
존스의 내면인 무의식 속으로
한편, 이렇듯 백인화되어있는 존스는 2장부터 원주민들에게 쫓기게 되면서 점점 그 자신의 내면인 무의식으로 파고들어 가게 되는데, 이때부터 오닐은 존스라는 한 개인이 느끼는 공포 심 리로부터 그것이 흑인 전체의 집단 무의식을 대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에 따라 오닐은 극에서 결론부에 다다를수록 백인화 되어있었던 존스는 점차 자신의 원형인 흑인의 정체성으로 다가서 고 그것이 흑인이라는 인종에 대한 문제의 실체를 파고드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에 상징적으로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백인화를 상징하는 존스의 복장을 점차 벗어던진다. 3장에서, ‘그는 파나마 모자를 잃었고, 얼굴은 긁혔고, 현란한 제목의 여러 곳이 크게 찢겼다.’ 4장에서 ‘그 제복은 넝마처럼 해지고 찢어졌으며, 그는 그 옷을 찢어발겨 내버린다.’ 그리고 ‘그는 허리까지 알몸이 된다.’ 이어 ‘그는 성가신 박차 또한 뜯어 내던진다.’ 5장에서 ‘그의 바지는 해지고, 구두는 찢어지고 일그러져 바닥의 창이 펄떡거린다.’ 이에 그는 “오, 불쌍한 발! 이놈의 신발은 발을 상하게만 하니 더 이상 소용없어”라며 신발을 벗어던진다. 6장에서 ‘그의 바지는 너무 해져서 남은 부분이 기저귀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이제 7장에서 그는 그가 보는 환영인 주술사의 ‘작은 짐승의 털가죽으로 허리를 두른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다.’는 모습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이에 가려져있던 그의 검은 피부와 함께 그의 흑인으로써의 정체성에 가까워진다. 다시 말해 그가 장면이 바뀔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그의 과거들인 그가 저지른 크고 작은 범죄들, 살해한 흑인 제프, 흑인 죄수들, 노예 경매대, 그리고 노예선, 그리고 아프리카 정글의 주술사를 만나면서 그는 점차 백인화되었던 그 자신에게서 본연인 흑인으로 돌아가는 것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끝에 이르러 존 스는 그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주술사의 제사 중에 “주여, 구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은총알이다! 아직 나한테 손은 못 댈걸!”이라고 말하며 백인의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자신에게 총을 쏘아 죽음을 맞이한다.
오닐은 『황제 존스』(The Emperor Jones)에서 흑인을 처음으로 자신의 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무대에 서도록 하면서, 오닐이 흑인을 그리고 있는 방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인이 흑인을
얼마나 백인화 시켰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닐의 이러한 시선은 자신의 극 안에서 흑인을 그려냄에 있어서, 흑인을 사회적 존재로써 그려내고 그에 대한 백인 제국주 의가 지닌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닐은 극이 진행되면서 (2장부터) 존스라는 한 흑인의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어 가 보여주면서 흑인이라는 인종의 집단의 문제를 대변하려는 시도함으로써 앞서 그 자 신이 사회적 존재로써의 흑인을 그려내면서 내비쳤던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에서 흑인이라는 인종의 자체의 문제로 보편화되고 함축되면서, 그 문제의식 또한 불분명해진다. 이에 따라 불 분명해진 문제의식 안에서 존스라는 비극적 인물이 맞이하는 죽음은 일반적으로 비극이라는 극의 형식이 그 안에서 주인공의 몰락 혹은 실패가 가져오는, 점화시키는 문제의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이 극에 있어서는 그 극적 효과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흑인이라는 인종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 논의를 혹은 문제의식 혹은 이 문제가 가진 모순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극은 그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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