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미국 3부작의 시작

반응형

미국의 목가1, 2 / 필립 로스 / 문학동네 (원문기준; 1997)

미국 3부작의 시작, 「미국의 목가」

울분에 이어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를 소개한다. 로스의 거침없는 내러티브 때문인지 꽤 빠르게 읽었다.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는 로스가 '주커먼 북(Zuckerman Books)'이라고 칭한 소설들에 속하면서, 이 시리즈에 속한 소설들 중에서도 미국 3부작인 「미국의 목가」(1997),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 「휴먼 스테인」(2000) 중 제일 처음으로 쓰인 소설이다. 이 세 소설 모두가 꽤 두껍고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시점을 보면 로스가 당시 얼마나 다작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 3부작은 각기 다른 시점의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역사적 사건들을 풀어내는 서술자이면서 관찰자가 바로 하나의 인물인 주커먼이라는 점이다. 그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목가」(1997)에서는 1960-70년대의 베트남 전쟁,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에서는 1950년대의 매카시즘, 「휴먼 스테인」(2000)에서는 1990년대 후반의 클린턴 대통령 탄핵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움직임을 다루었다. 이 굵직한 역사들은 1930년대 출생의 필립 로스가 직접 겪어온 사건이자 시간들이었으며, 로스는 이를 주커먼이라는 자신의 분신의 시선을 통해 개인이 어떻게 그러한 역사의 거대한 사건들을 겪고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서술자의 내, 외적으로 심도 있게 바라본다.

네이선 주커먼은 누구인가?

네이선 주커먼은 「유령 작가」(1979)에서 처음 등장했고, 그 이후로 로스의 서술자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주커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로스 자신을 대변하는 페르소나와도 같다. 직업이 작가이면서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주커먼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미국의 목가」에서 스위드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 아이라 린골드의 삶을, 「휴먼 스테인」에서 콜먼 실크의 삶을 입체적이게 그려낸다. 이러한 로스의 서술 전략은 로스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가상에 대한 개념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바로 그의 서술 방식이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간다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그가 아닌 그의 대역인 네이선 주커먼을 통해 말한다. 실제로 존재했을법한 가상 인물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본다. 그의 서술에는 진실에 가까운 고백과 상상이 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기도 하지만, 출처가 불확실한 사건의 이야기가 담기기도 한다. 이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건 다름 아닌 리얼리즘에의 새로운 시도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하는 모든 소설가가 직면하는 문제를 필립 로스는 자신의 페르소나 서술자 네이선 주커먼을 통해서 실험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실재와 허구 그 사이

머리로는 스위드를, 또 전시 위퀘이크 고등학교의 의기양양하던 시절부터 1968년 그의 딸의 폭탄이 터지기 불과 이십오년 사이에 그의 나라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고 있다. 그 수수께께 같고, 곤혹스럽고, 특별한 역사적 변천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1960년대를,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빚어낸 무질서를 생각하고 있다. 어떤 가족은 자식을 잃었고 어떤 가족은 잃지 않았는데, 시모어 레보브 가족은 잃은 가족에 속했다는 것. 관용이 가득했던 가족들, 친절하고 좋은 의도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호의가 가득했던 가족들. 그 가족들의 자식은 미쳐 날뛰거나, 감옥에 가거나, 지하로 사라지거나, 스웨덴이나 캐나다로 달아났다. 나는 스위드의 엄청난 추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것이 자신이 제대로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의 원인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는 어쨌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그에게 벌어진 파국은 그가 제대로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무슨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을까? (p142-143, 「미국의 목가 1」, 문학동네)

"스위드.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전쟁 시절, 뉴어크의 우리 동네에서 스위드는 마법의 이름이었다."라는 주커먼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초반의 내용이다. 주커먼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스위드 레보브. 그는 동네 또래들의 우상이었다. 주커먼은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편지가 오가고 스위드가 주커먼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자세한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 주커먼은 생각에 빠진다. 이는 실재가 아닌 자신의 공상에 불과하다. 주커먼은 퍼즐을 맞추려고 하고 있다. 스위드의 생각조차 주커먼의 공상의 결과물이다. 이 대목은 이 소설이 보려고 시도하는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이야기의 퍼즐 조각들에 해당하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실재와 허구가 서로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는 것 같다.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개인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주커먼의 상상들: 상상에 의해서 사실이 어긋나고, 사실에 의해서 상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부분 이후로 전개되는 내용은 서로 맞지 않는 그리고 실제로 퍼즐의 완성된 그림도 존재하지 않는 각각의 퍼즐 조각들이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 할만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