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
읽은 지 조금 시간이 흐른 소설이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 첫 페이지에 읽기 시작한 날과 책을 다 읽었을 때 다 읽은 날을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에 읽기 시작하여 10월 26일 금요일에 다 읽었다. 나의 읽기 속도로 보아 꽤 속독하여 읽은 축에 속한다. 이 책에 이어, 포트노이의 불만,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굿바이 콜럼버스, 그리고 에브리맨을 차례대로 읽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 책으로 필립 로스에 입문하여 팬이 된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필립 로스는 내가 그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해인 2018년 5월에 울형성 심부전으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죽기 10년 전인 2008년에 쓰였다. 그가 절필 선언을 한 것이 2012년이니까, 그의 저서 목록 중에서도 끝쪽에 속한 소설이다. 이미 미국의 4대 작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그 시기에 네메시스를 테마로 소설을 많이 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로스가 그 시기에 쓴 소설들 에브리맨(2006), 울분(2008), 험블링(2009), 네메시스(2010)가 네메시스 시리즈로 분류된다.
네메시스 시리즈의 완결이면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인 «네메시스»를 발표하며, 필립 로스는 네메시스가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설명에 걸맞게 네메시스 시리즈 중에서 읽었던 두 편의 소설, 에브리맨과 울분을 살펴보면 두 소설 모두 한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 소설의 내러티브를 이루고 있다.
3년 전의 나와 마커스 메스너
3년 전에 읽었던 책을 되짚어보려니까 그 당시의 나 자신이 보인다. 2018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졸업하고는 글을 좀 끄적여보고 좋아하는 책을 찾아 읽는데 매진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한동안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두려운 마음에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다가 미국의 작은 회사에서 재택으로 일하게 되었다. 재택이라는 조건에 끌려서 일을 시작했고, 그런 조건이라면 글을 쓸 시간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해야만 하는 '일'은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나 스스로 미루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소설 쓰기와 읽기는 뒷전으로 두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어느 날 나 자신을 보니까 나는 '일'만 하고 소비로 그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를 이틀 앞두고서 다 읽은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라서 어느 소설보다 나의 인생사와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커스 메스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모르핀에 취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유태인 가족이다. 외아들인 메스너는 부모님의 기대와 걱정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런데 그 걱정은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대학에 가지 않는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던 미국의 상황과 메스너가 대학에 가게 되어 집을 떠나면서부터 고조된다. 메스너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어떤 이유들이 겹친 것이든, 그전까지 자비롭던 아버지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걱정을 하게 되었고, 낮이나 밤이나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어디 갔었느냐? 왜 집에 없었던 거냐? 네가 나가서 어디를 싸돌아다닐지 내가 어떻게 안 단말이냐? 너는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둔 청년이야. 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이러한 소설적 긴장감은 아버지의 불안감과 함께 소설의 끝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메스너는 영리했고, 성적도 매우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과 지향점이 뚜렷했다. 내가 보기에 메스너는 진리를 추구했고, 그에 합당한 이론들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저서가 언급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정서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1950년대 미국의 대학은 채플을 필수로 했고, 남녀 기숙사를 따로 썼다. 많은 것들에 규칙이 있었고, 도덕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메스너는 이런 상황에 어떤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고, 답답함을 느끼면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는 기숙사의 룸메이트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해 결국 1인실로 옮겨가게 되고, 올리비아라는 소문이 무성한 여학우와 사랑에 빠지면서 방황한다. 그러던 중 학생과장과의 면담이 끝날 무렵, 맹장이 터져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그 병원에서 올리비아와 메스너 사이의 그 시대의 도덕에서 선 넘은 행동들이 오간 것을 간호사가 보게 되고, 그 일은 학생과장의 귀에 들어간다. 거기에 메스너가 대리 참석을 시킨 채플 시간도 꼬리가 잡혀 메스너는 퇴학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반도로 가게 되고, 거기서 부상을 당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다.
무엇을 탓해야하는가? 탓하는 것이 중요할까?
왜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시대에 발맞쳐가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걸까? 그 자신의 탓일까? 부모님의 불안 때문일까? 그래서 그가 한눈팔고 올리비아와 사랑에 빠진 걸까? 그의 신념 때문일까? 무신론을 광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일까? 그의 탓으로 돌리자면 그렇다. 너무 앞서 나간 이론을 지지한 까닭에. 그가 절제력을 가지지 못한 까닭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메스너의 잘못일까? 어쩌다 보니 그는 절벽의 끝으로 내몰렸다. 아버지의 편집증적인 걱정에, 시대적 금기들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의 강직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영역을 한정 짓고 좁히는 것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다. 하지만 그렇게 좁혀져 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외부적인 때가 많다. 스스로를 돌볼 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3년 전 나는 비슷한 방식으로 코너에 몰렸던 것 같다. 모두 비슷하게 행동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는 감각이 작동했다. 내가 누려온 안전지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내 영역은 더 좁아질 뿐이었다. 왜냐하면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 영역 안에서 발버둥 쳐봐야 더 답답해질 뿐이었다. 이 소설은 그래서 내게 더욱이 체험적으로 다가왔다. 비슷하게 느껴본 나에 대한 부모님의 불안, 사회적 기대와 도덕, 그리고 진한 경계선.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조금 완화시켜주었던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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