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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2022년 1월 19일, 눈 많이 옴. 그리고 제발트 2022년 1월 19일 수요일 아침 9시의 하늘은 흐릿하고 어둑하며 가벼운 눈발이 흩날린다. 눈발은 점점 두꺼워지고, 건물의 옥상 외벽에 진한 하얀색 테두리가 만들어진다. 눈발은 시들해졌다 거세지기를 반복한다. 낯익지만 드문 풍경이 펼쳐진다. 오늘처럼 흐릿하고 어둑한 풍경과 유사한 느낌의 기억의 풍경을 그려내는 작가가 있다.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다. 어떻게 진짜 현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제발트는 1980년대 이후 독일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인간 실존과 되풀이되는 역사적 재앙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그것을 내면적인 서사로 이끌어내면서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시간, 생명, 문명과 인류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탁월한 문장들의 보고 존 치버에 대해서 존 치버 John Cheever(1912-1982)는 20세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교외의 체호프 라 불리기까지 하면서 가족, 사랑, 그리고 죄의식에 관한 단편 소설들로 유명하다. 존 치버의 단편들은 대부분이 뉴요커를 통해 발표되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간 친분이 있었던 레이먼드 카버가 우리나라에서 유명세가 높은 것에 비해 존 치버는 그의 작품에 비하면 카버만큼 유명하진 않은 것 같다. 또, 왓샵 가문의 이야기로 미국 중산층의 삶을 그려낸 장편 소설로 전미 소설상을 받고, 대중적인 인기도 얻게 되었다. 그 외에도 불릿파크(1969), 팔코너(1977), 등의 장편을 발표하였고, 1982년 마지막 장편인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출간하고 같은 해에 사망했다. ..
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기억이 늘 희미한 이유 가즈오 이시구로가 기억에 접근하는 방식.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은 과거에 남겨놓은 무언가, 케케묵어 고착화된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하지 않았더라면 가장 후회할만한 일을 택하라는 것이다. 앞을 내다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서 실패한 경험보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일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쯤, 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계를 유지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 시작의 과정을 제대로 겪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어중간한 선택을 했다...
필립 로스 «울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정의 골 네메시스: 운명, 불운, 어떤 이를 골라 희생자로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힘 읽은 지 조금 시간이 흐른 소설이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 첫 페이지에 읽기 시작한 날과 책을 다 읽었을 때 다 읽은 날을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에 읽기 시작하여 10월 26일 금요일에 다 읽었다. 나의 읽기 속도로 보아 꽤 속독하여 읽은 축에 속한다. 이 책에 이어, 포트노이의 불만,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굿바이 콜럼버스, 그리고 에브리맨을 차례대로 읽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 책으로 필립 로스에 입문하여 팬이 된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필립 로스는 내가 그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해인 2018년 5월에 울형성 심부전으..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위안을 주는 문장들로 가득한 소설 밤하늘의 별자리 같은 소설 100여 편의 짧은 글들이 하나의 소설이 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별자리에 비유했다. 밤하늘 이곳저곳의 별들이 별자리를 이루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듯, 자신의 짧은 글들이 모아 별자리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짧은 글을 그러모아 하나의 글로 묶는 방식은 다른 작품에도 적용된다. «태고의 시간»도 그렇고, «낮의 집, 밤의 집»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작가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꼈다. 한편으로는 산문 시를 여러 편 읽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서사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별자리 같은 이 소설은 서사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마음 깊숙히 자리한 고..
벌린 클링켄보그 «짧게 잘 쓰는 법», 글쓰기의 즐거움 되찾기 리듬감에 집중하기: 쓴다는 것에 대해 되돌아보기 글을 쓰다 보면 어느 때인가부터 나도 모르게 창작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결국 어떤 글을 쓰든 마무리 지으면서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쥐어짜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글을 쓰는 방식과 글을 왜 쓰게 되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책의 시작부터 저자인 벌린 클링켄보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리듬감에 집중하세요."라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가 쓰는 많은 글들—습작으로 쓰는 소설이든 일기이든 뭔가를 끄적이던 것이든 일과 관련된 보고서를 쓰든 이메일을 쓰든—을 쓸 때, 그 리듬감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은 언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음성을 매개로 하며, 모든 음성에는 리듬이 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원석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서평쓰기의 실용적 지침서 서평과 독후감은 다르지만 동일한 것 저자는 서평과 독후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서평은 논리적이고, 외향적이며, 관계적'이다. 이와 달리 '독후감은 정서적이고, 내향적이며, 일방적'이라고 말한다. 이 둘의 비교로 저자는 서평의 필요성과 우위를 강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양자가 서로 통한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한편으로 마음이 치유되는 만큼 책을 더 깊이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책(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통찰은 책을 읽는 나 자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서평과 독후감의 관계가 다르지만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서두를 정리 한다.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이 서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서평과 독후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독후감보다는 서평을 지향해나가야 하는 이유와 ..